1월 21일 장영일씨를 만났습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장영일씨는 오랜만의 손님이 반가운지 참 즐겁게 맞아주십니다. 이야기 나누고 라면도 같이 먹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이 참 따듯한 분입니다. / 청주노동인권센터

 

# 어떻게 남한으로 오게 되셨어요?
북한에 있을 때 헌병대에서 일했어요.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잘못한 사람들을 잡는 일을 했죠. 그러다보니까 여러 지역에 다니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많이 보게 됐어요. 여기 제 손가락에 칼로 베인 자국이 있어요. 아무것도 못 먹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제 손가락을 그어서 피를 짜 먹였어요. 그 일이 있은 후에 우리 둘째 누님까지 굶어 죽는걸 보니까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못 있겠다 싶어서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오게 됐어요. 원래 남한으로 올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어서 타향에서 5년 떠돌다가 남한이 살기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게 됐어요.

 

# 처음 온 느낌은 어떠셨나요?
천국 같았죠. 내 자식들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었어요. 저는 북한에 있을 때 과자, 사탕 먹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남한은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는 사회였어요.
처음에는 들떠서 겁나는 게 없었죠. 이 사람이 돈 달라면 주고, 저 사람이 달라하면 또 주고 그랬어요. 그렇게 내 지갑을 다 털어주고 내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까 그때는 겁이 나더라고요. 내가 버스표가 없어서 누구한테 달라고 하면 아무도 안줬어요. 나는 안 그랬거든요. 옆에 할아버지가 500원이 부족해서 표 못 끊으면 할아버지한테 5천원 드리면서 표도 끊고 간식도 사드시라고 드렸어요. 그렇게 한 두번 한게 아니라 내가 돈만 있으면, 내가 베풀 수 있는 건 베풀었어요. 그런데 내가 가진게 없을 때 막상 내 주머니를 채워주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 여기서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밥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던데요?
청주직업교육학교 남교수님한테 용접 기술을 전수 받았어요. 용접 기술로 집 짓고, 파일 용접하고. 용접이란 용접은 돌아다니면서 다 했어요. 대한민국 전국구로 다녔죠. 거제도, 구미, 광주, 목포, 삼척….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일했어요.
한 현장에서 일 시작할 때 제가“전 밥 많이 먹습니다. 많이 먹어도 괜찮겠습니까.” 물었어요. 그랬더니 괜찮다고 해서 계약서에 밥 많이 먹어도 된다는 내용도 써놨어요. 그런데 나중에 월급을 보니까 밥값을 30만원씩 공제한거예요. 그래서 물어보니까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감당이 안된다면서 그만두라더라고요. 제가 그 당시 한끼에 12공기씩 먹었거든요. 남한에서는 한끼에 많이 먹어봐야 2공기라고 합니다. 참 그때 억울하고 서러웠죠. 분명히 밥 많이 먹어도 된다고 했거든요.

 

# 센터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일하다 다쳐서 KBS방송국에 찾아갔다가 피디님 만났는데 그 피디님이 조광복노무사님을 소개해주면서 센터를 알게 됐어요. 청주노동인권센터 덕에 산재도 인정받게 됐죠.


# 일하다 다치셨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된거예요?
2011년 10월 30일 잊을 수 없는 최악의 날이예요. 그 당시 전력구공사 하청업체에서 자재 인상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크레인 운전하는 사람이 신호를 보내지 않고 운전하는 바람에 제 몸이 4~5m 아래로 추락해서 허리 신경을 다쳤어요. 그 통증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서 진통제를 하도 많이 맞아서 엉덩이가 새카맣게 됐어요. 사고에 대한 산재는 인정 받았지만 이후에 계속되는 통증에 대해서는 인정이 되지 않아서 노동인권센터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게 된거예요. 그 통증이 얼마나 심하냐면 불로지지고 칼로 후벼파는 느낌이에요. 지금은 통증을 완화해주는 기계를 몸에 삽입해서 통증을 버텨나가고 있어요. 그렇게 해도 계속 아프니까 일도 못하고 우리 마누라가 일하느라 고생이죠.

 

# 그럼 통증이 계속되는 것 말고는 건강에 문제는 없는 건가요?
정신과에서는 우울증, 신경악화, 자살 충동이 높아지고 있대요. 고생하고 돌아오는 마누라 보기도 힘들고, 애들이랑도 못 놀아주고, 아파서 만사가 귀찮고 그래요. 많이 아플때면 고향 생각이 자꾸 나요. 죽을땐 고향에 가서 죽고 싶은데…. 참 묘해요. 풀뿌리 나무뿌리 먹으며 고생하며 살았는데도 아빠 엄마가 계시는 고향, 선조들 무덤이 있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 힘드셔도 가족들 때문에 힘을 내셔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가족을 꾸리게 되셨는지? 아이들에게 바라는게 있으시다면?
처음에 중국에서 돌아다니다보니까 지금 아내를 만나게 됐어요. 처음 보는 순간 너무 예뻐서 저 여자 내가 꼭 잡아야겠다 싶었어요. 보기만 해도 마음이 벅차고 없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그 뒤로 목숨 걸고 쫒아 다녔죠. 제가 또 감이 좋아서 아내가 천번 도망가면 천번을 다 찾아내서 잡아다 놨어요. 나랑 결혼 안하면 내가 죽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내가 내가 죽을까봐 무서워서 결혼했대요. 그렇게 지금 가정을 꾸리게 됐죠.
지금 아들이 둘이 있어요. 제가 군인이어서 그런지 우리 애들도 37명이랑 붙어도 배짱있게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크면 좋겠어요. 이소룡 같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우리 마누라는 싫어하지만요.  <끝>

Posted by 청주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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