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다. 도서관에 왔는데 카페 문을 열지 않으니 더 있을 맘이 없다. 책을 읽으러 온 건지 커피를 마시러 온 건지 모르겠다. 간식 없이 더 있긴 어렵다.


일찍 일어나 비빔밥과 묵밥을 만들어 가족들 먹이고 청소한 나를 위해 <커피 번> 하나를 사들고 점심시간 지나 집 커피 먹으러 갔다. 내 친구들은 거의 일을 하고 나만 안하니 친구도 자연이 줄고 휴대폰 제공통화량에서 100여분이 남아돌 지경이다. 딱히 지금 전화할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내가 좀 초라해지려는 순간 이게 바로 내가 몇 년 전부터 그려왔던 내 꿈이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꿈의 정점에서 안과 밖은 많이 다르다.
꿈이 이루어진걸 알게 된 기념으로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잤다. 꿀맛이다.


그전과 달리 살아 본 지난해는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지도 별다르지도 않았다. 다만 속도가 무척 느려졌다. 시간이 많으면 기필코 하리라고 수첩에 적어두었던 반짝반짝하던 계획들을 일년지나 다시 꺼내보니 뭐 시큰둥하다. 몇 가지는 할 기회가 왔는데도 ‘뭐 이거 해봤자 재미없겠다’고 시간과 절박하게 싸웠던 과거를 배반하고 있다.


지난 12월 한해가 가는 마당에 나는 집안 구석구석 정리할 것이 없나 살펴보았다.
나의 많은 문제가 버릴 걸 끌어안고 산다는 데서 비롯된 걸 알게 되면서 버릴 걸 발견하면 기쁨을 느낀다.
‘너 없이 살아 볼 테다!’
있게 살고 싶던 내가 없게 살자고 몸부림치고 있다.


오늘 내 눈에 들어온 곳은 욕실과 안방사이에 자그마한 방. 한 평도 채 안 되는 옷 방이다. 그 방안에는 책상 같은 화장대와 의자 하나가 있는데 내가 의자에 앉으면 내 뒤로 겨우 한사람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다. 옷을 치우고 화장대 한 쪽에 천장까지 폭 한 칸짜리 조붓한 책꽂이를 설치했다. 1층엔 몇 권의 수첩과 일기장, 2층~5층엔 딱 지금 읽는 책만 두었다. 그 외엔 노트북과 필기구등 딱 몇 가지만 두었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조그맣고 하얀 스탠드. 겨우 한권의 책만 비출 수 있지만 이게 온 세상을 비추는 것만큼 밝다. 스탠드를 켜고 여기 앉아 책을 읽으면 마치 이 작은 방이 팽창하는 것 같은 충만함마저 느끼게 한다.

 

 

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 여기는 그냥 화장실과 안방 중간에 있는 큰 목적 없는 공간이었다. 집안일을 다 끝내지 않아도 이방에만 들어오면 가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틈만 나면 나는 이곳에 들어오고 싶다.


딱 1년 전이다. 4년을 일한 영어강사들 수천 명이 모두 해고를 당하게 되었고 나는 그 김에 자발적 노동거부를 택했었다. 이것은 연애하다가 상대방이 나를 찬 직후에 나도 차서 거의 동시에 찬 것처럼 하여 내 상처를 줄여 보고자하는 잔머리에 비겁함이랄 수도 있는 거였지만 말이다.ㅎㅎ


재 선발 시험해 응시할지 말지는 여하튼 쉽지 않은 고민이었다. 내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그 즈음 어느 날의 꿈 때문이었다. 꿈에서 나는 여태껏 내가 알지 못했던 내 집 안에 빈방을 보게 되었던 거다. 내가 어떤 낡은 2층집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 내가 모르던 숨겨진 방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르치던 무리의 아이들이 오밤중이 돼서야 내 집을 우르르 몰려나가는 소란스러움 뒤에 나는 고즈넉한 빈방을 보게 되었다. 화려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냥 비어있는 그 곳을 보았을 때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꿈에서 깬 나는 ‘나에게도 정말 빈방이 있을까’ 생각했다. 허무맹랑할 수도 있는 꿈에서의 빈방을 믿고 나는 그동안의 일을 모두 접게 되었다. 예상보다 아주 이른 퇴직이었다.


일 년 전 꿈에서 본 빈방을 이제야 발견한 건가.
나는 넓은 거실에서 물러나와 작은 방의 주인이 되었지만 기분 좋았다. 내 방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금 있다 해도 계속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 머무는 동안 나의 방일 것이다. 창문이 없는 이 방에 있는 동안 나는 누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오로지 나만 바라본다. 이 방안에 있으면 이제 놀만큼 놀았으니 일하러 나가라는 세상의 소리도 통장잔고가 비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에게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며 나는 지금 재미난 방 안에 있다.  <끝>

 

글쓴이 : 김기선 (영어전문강사입니다. 현재 계약만료로 실직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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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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